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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

0409 '작가와의 대화' 심보선

엔키ㅋ 2014. 5. 27. 01:34


벌써 한 달도 더 되어서 가물가물하다. 

인상적이였던 말들을 간단한 메모식으로 기록해놓았는데 좀 정리하고자 한다.  


1. '집중' 과 '관찰'에서 오는 시. 

'물고 늘어지는 것'이라고 하면서 '초를 물고 늘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짧은 순간을 깊이 관찰해서 시간의 밀도를 높이는 걸 뜻한게 아닌가 싶다. 

내가 좋아하는 '슬픔이 없는 십 오초'도 그렇게 탄생했다고.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자주 가던 꽃집이 있었는데 그 꽃집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고 고양이는 꽃을 뜯어먹고 있었다고 한다.  그 순간 복잡한 감정이 찾아왔을테고 그래서 '초단위로 늙어가는'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이처럼 삶의 모든 순간은 시의 영감이 될 수 있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런 영감을 맞닥뜨리게 된다.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식당 아주머니가 십장과 싸우고 온 공사장 남편에게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영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야'라는 맥락의 말을 했다고 한다. 평소에 '영혼'이라는 단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때 굉장히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그러니까 두 번째 시집부터는) '영혼'이라는 시어가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시의 영감이 되었던 몇몇 장면들을 풀어놓았다. 무심하게 지나칠 뻔 했던 공사장의 인부가 쉬면서 발짓으로 뭔가를 그리려고 했던 장면, 여름날 어떤 사람이 나에게로 오는데 매미울음 소리와 함께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 등 


2. 어떤 시는 직설적이지만 야릇한 느낌을 준다.

 '은유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현한 시는 재미없을 것 같은데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 뭔가 있을 것 처럼 표현했는데 재미가 없고, 어떤 시는 직설적인데도 '야릇한' 느낌을 준다.(개인적으로 '야릇하다'는 표현이 몹시 적절하다고 생각) 그러면서 예시로 김수영의 시를 들었는데 '개새끼'라는 욕설이 들어가는 것 같다고 했다. 이마저도 기억이 잘 안 남. 

그래서 '김수영 개새끼'라고 검색했더니 '거대한 뿌리'가 나왔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은 여자,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反動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鐵筋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은 巨大한 뿌리에 비하면

[출처] 김수영과 그의 자식|작성자 연어 


3. 심보선은 시인이면서 사회학자이다. 

[출처] 김수영과 그의 자식|작성자

 연어

문학과 사회학은 좀 상충되어보인다. '슬픔이 없는 십 오초'와 그 밖의 시를 읽었을 때는 개인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여서 그가 사회학자라는 사실이 의외였다.  (사실 그는 저항시를 쓰기도 한다.) 그는 사회학자에 견주어서 시인은 의견이 없으며 세계관이 없다고 말했다. 시는 '나는 이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며 사회학은 '나는 이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시는 '1%의 확실성과 99%의 불확실성'에 대한 것이며 사회학은 '99%의 확실성과 1%의 불확실성'에 대한 것이여야한다. 


"어쩌면 아버지와 베버가 말하듯 삶과 글쓰기는 고독한 작업으로 시작하여 고독한 작업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 출발과 회귀 사이에는 고독한 여정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몸과 영혼을 뜨겁게 하고, 내 가슴 속에서 말을 들끓게 하고, 나의 손발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단순히 주제의 흥미로움이 아니라 바로 동시대인들의 삶이고 그 삶에 섞여드는 사물들의 동시대적 운동이다. 베버와 아버지는 삶과 예술, 삶과 학문을 분리시키라고, 그것을 하나로 합치려는 시도는 위험하다고, 지나친 열정을 잘 다스려서 성실성으로 바꾸라고 말했다. 나는 베버와 아버지의 충고를 받아들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삶에 이끌린다. 친구들과 연인과 동시대인이 살고 있는 삶에 매혹된다. 나는 삶과 일, 삶과 작품 사이를 쉼 없이 오간다. 돌아가신 이들의 충고와 살아 있는 이들의 부름 사이를 쉼 없이 오간다. 나의 말과 행동, 나의 기쁨과 슬픔은 그 사이 어디에선가 태어나고 소멸하고 다시 태어난다."


출처: 서울대학 신문, 멋지게 살려하지 말고 무언가를 이루려 해라

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48


 문학과 사회학은 공통적으로 '동시대인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둘의 사이-'예술'과 '학문'-에 삶이 있다.   

그러므로 차이는 있지만 서로 배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 글을 다음 해 2월이 되어서야 수정해서 올리는데, 그 때 강연회를 같이 들었던 친구(구닌)에게 '슬픔이 없는 십오 초'를 빌려주었다. 태국 가기 며칠 전이였다. 예상치 못하게 6개월 더 있게 되었고, 책을 돌려받지 못했다. 어려운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잘도 읽는 그 친구는 '음....역시 시는 잘 모르겠어'라고 한다. 나는 이 시집이 그립다. 내 유년은 우울하지 않았지만 그의 우울한 유년시절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거웠다. 모든 것에 무심한 듯한 언어였지만 위트가 있어서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외로워도 슬퍼도 엄마의 심장은 디덤디덤 뛰겠지만' 

같은 구절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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